4.8 (목) 맑음 (사라고사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Barcelona)

 카탈루냐 자치지방 바르셀로나주(州)의 주도(州都)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며, 항만규모와 상공업 활동에 있어서는 에스파냐 제1의 도시이다. BC 3세기에 이 곳을 지배한 카르타고인이 바르시노(Barcino), 즉 바르카가(家)의 도시라고 명명하였다. BC 201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아직도 구(舊)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딕가(Gothic街:바리오·고티코스)에는 그 당시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大帝)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이루어졌고, 바르셀로나는 17∼19세기에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북부 카탈루냐 지방을 프랑스에 빼앗기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는 에스파냐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36∼1939년의 에스파냐내란 당시에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가 1939년 1월에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시가의 중심인 람블라로(路)에는 은행·상사(商社)·고급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인 항구 부근의 푸에르타데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바르셀로나의 공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섬유공업(방적업)인데,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 영향으로 1845년에 14∼15만 명에 지나지 않던 인구가 1931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화학·금속공업도 가세하여 이베리아반도 제1의 도시가 되었다.

내란 후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한때 마드리드에 그 자리를 빼앗겼으나, 그 후 관개시설이 갖추어진 에브로강(江) 서부의 풍부한 농산물과 피레네의 수력(水力)으로 자동차·항공기 공업, 식품가공업 등이 활발해지면서 번영을 되찾고 있다. 카탈루냐 문화의 중심지답게 인쇄업도 활발하며, 지금도 문화·경제의 모든 면에서 카스틸랴의 중심인 마드리드에 대한 대항의식이 강하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바르셀로나팀과 한국팀이 축구를 하면 마드리드 사람들은 한국을 응원한다고 하니 스페인 내전으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우리의 지역감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단다.

람블라 거리

 

사그라다 파밀리아

 

 

 

 

 

 

 

 

 

 

 

 

 

 

 

완공된 사그라다 파밀리에

http://view.weimag.cn/mobile/MAGb0a1821e-09c4-424b-8137-5f1eb0211908@1?tid=44329

 

바르셀로나해안선

 

바르셀로나 대성당

 

 

                                                        대성당 내부

 

 

                    몬주이크(Montjuic)언덕에서 바라본 스페인광장

  

                               카탈루냐 미술관

 

 

fc바르셀로나 경기장

 

유럽에서는 가장 큰  캄프 누(Camp Nou)경기장 수용인원 98,772명 (세계에서 11번째 크기)

 

 

리오넬 메시 (Lionel Messi)

 

시가는 서부의 티비다보, 남부의 몬쥬익(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일본선수를 제치고 우승한 그 유명한 언덕)의

 

구릉지 시민들의 행락지이다. 1992년 제25회 하계올림픽대회가 개최되었으며,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12개를 획득, 종합순위 제7위에 올랐다.

                  <황영조 기념 조각상>(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우승)

 


                       스페인 올림픽종합운동장

 

 

 

후안미로(Joan Miro 1893~1983)는 굳이 토를 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다. 그의 천진난만한 원색은 현대미술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꽤나 익숙한 이미지다. 그보다 더 유명한 화가로 들 수 있는 이름은 파블로 피카소 정도나 될까? 바르셀로나에서는 파블로 피카소, 후안 미로, 그리고 그들 못지않게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이 모두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들이라니. 스페인의 저력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1893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특히 카탈루냐 사람들이 사랑한 후안 미로의 작품은 이 도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후안 미로 미술관도 따로 마련되어 있고, 후안 미로 공원도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여행자들이 더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람블라스 거리 한가운데 있는 타일로 만든 후안 미로 광장 아닐까. 관광의 메카라는 람블라스 거리 한복판에 이 작품이 가로누워 있는 까닭은 '바르셀로나에 온 관광객을 환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굳이 챙겨보지 않으면 밟고 지나치기 십상인 대가의 원작.

피카소 미술관 Museu Picasso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는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그렇기 때문에 피카소 미술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미술관이다.


피카소가 태어난 곳은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인 말라가이다. 1881년에 태어난 피카소는주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데, 이곳 미술관은 그가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14세기 경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귀족 저택, 아길라르 궁전을 개조한 것이다. 1963년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피카소의 유년시절의 연필 습작품부터 과거의 유명작품들을 리메이크한 작품까지 무려 3,000여 개의 작품이 모여 있다.

 

            람블라스 거리('목이 떨어져 나간 사람' performance)

 

 

 


 

 

 

 

구엘공원 Park Guell

바르셀로나의 색채를 이야기하면서 가우디 빼놓을 수는 없다. 가우디의 어떤 작품을 이야기할까가 고민스러울 뿐. 곡선과 다양한 색깔을 써서 신비롭기까지 한 건물을 지어냈던 그의 작품은 바르셀로나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그곳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그 중에서도 구엘공원 색색깔의 타일조각, 독특한 기둥과 화려한 천정, 모자이크 분수, 조각품과 구불거리는 벤치로 가득 찬, 말 그대로 '가우디월드'라 할만한 곳.

스페인에선 한 세기에 한명씩 걸출한 미술 작가가 난다는 말이 있었다. 적어도 19세기 이전엔 그랬다. 16세기엔 원근법의 창시자인 벨라스케스, 17세기엔 고야, 18세기엔 카잘스가 있었다. 19세기엔? 이름에 광휘가 서려있는 피카소, 미로, 달리, 그리고 건축가 가우디가 한꺼번에 스페인을 빛나게 했다. 안토니 가우디는 1852년 태어나 1926년 죽었다. 그는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이 가우디를 처음 주목하게 된 건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가우디가 출품한 독특한 디자인의 진열장이 사람들 눈을 사로잡았다. 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발견한 에우세비 구엘은 최대의 스폰서가 된다.


구엘이 아파트단지를 짓기 위해 가우디에게 맡겼던 이곳은 14년간의 공사기간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구엘이 죽은 뒤 그 가족이 시에 땅을 기증하면서 구엘공원이 되었다. 가우디가 1906년에 이사 와서 죽기 직전까지 20년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오면 가우디 박물관도 둘러볼 수 있다.

                                      <구엘공원front gate>

 

 

 

카사밀라(Casa Milà)

 

카사 바트요

 

바르셀로나 개선문

 

스페인 광장에 위치한 Venetian Towers

 

 


                                     <파도 통로>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뒤를 졸졸 좇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아직 젊은 가우디가 건축가로서의 꿈을 가득 담아 지어 올렸던 카사 비센스(Casa Vicens), 구엘을 위해 지은 별장인 파베욘스 구엘(Pavellons Guell), 그리고 구엘 가족이 살았던 집, 팔라시오 구엘(Palacio Guell), 곡선으로 된 외관이 신기한 카사 바트요(Casa Batllo), 카사 밀라(Casa Mila) 아직도 짓고 있는 사그라다파밀리아(Sagrada Familia)...뿐이랴, 레이알 광장의 가로등 가우디의 작품이다.

가우디에서만 만족한다면 바르셀로나가 아깝다. 이곳의 수많은 다른 건물들이, 가우디의 건축물이 개인적인 천재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가우디에게 영향을 주었던, 가우디와 함께 발전하며 키를 높였던 건물들을 둘러보면 그를 낳은 도시, 바르셀로나의 전모가 짐작이 갈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Saint Famíly) 교회(성 가족 교회 )거대한 옥수수 4개가 하늘로 치솟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은 1882년 3월 19일 성 요셉의 날에 시작된 건설 작업이 1세기 이상이나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완성까지는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한지 알 수가 없다고 하니(2026년에 완공 예정이라고도 함)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로마 가톨릭 성당이다. 현재 완성된 것은 지하 예배당, 아프스부, 현관하나와 탄생문으로 중앙에는 160m의 탑이 설 예정이다.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설계하고 직접 건축을 책임졌다.

가우디는 1883년부터 40년 이상을 이 교회의 건설을 책임졌으며, 말년의 15년간은 여기에만 매진했다. 1935년스페인 내전으로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다시 재개되었다. 1926년 가우디가 죽은 후 미완성 건물 일부와 성당 모형이 스페인 내전 와중에 부서지기도 했다.

지역 신문에 따르면 2004년 성당을 찾은 사람은 모두 226만 명으로, 프라도 미술관알람브라 궁전을 제치고 에스파냐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건축물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탄생의 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장 큰 문인 파사드 해도 3개나(탄생의 문, 수난의 문, 영광의 문) 되어서 아직까지 완공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완공되었을 때의 규모도 엄청나는데, 완공 시 건물 크기는 가로 150m, 세로 60m, 높이 170m로 예상된다. 엘리베이터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바르셀로나가 한눈에 다 보인다고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어느 특정한 정부나 교회로 지원을 받아 건설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건설 초기에는 개인에 의한 기부로 건설되었다. 현재는 여행객의 입장료로부터 얻은 수익금을 건설 비용으로 충당하고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수난의 문

 

  '까사 밀라(Casa Milá)'
가우디 건축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건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형태를 띤 주거용 건축물.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카사 빠띠오 백작의 "해골의 집"

 

#4. 어떻게든 굴러가는 88일간의 자전거 유럽여행 -4일차-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 몬세라트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 모누멘탈 투우장(Pl. de Toros Monumental)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 스페인광장의 분수쇼

 

 '몬세라트(Montserrat)'  톱니 모양의 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수많은 야생화와 희귀식물들을 볼 수 있다.  깊은 협곡에는 베네딕토 수도원과 바실리카 성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내부에는 미켈란젤로, 엘그레코를 비롯한 스페인, 이탈리아 화가들의 화려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죽기전에 꼭 봐야할 아름다운 전경 몬세라트에 가다스페인 몬세라트 바실리카성당, 베네딕토수원, 검은성모상



 

                                        스페인 광장

 

 

                           환상적인 바르셀로나 분수쇼

 

오늘 (2010. 5. 3) "세상은 넓다" 시간에 우리가 다녀온 여행지 중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옛수도 똘레도와 대성당에 대한 동영상과 여행정보가 방송되어서 너무나 반가웠고 여행기간즐거웠고 소중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Oh! I'm so happy !!!

 

 

Posted by 블랑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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